1.마리아 칼라스: 오페라의 여왕의 성장과정과 뛰어난 가수활동

20세기를 대표하는 소프라노로서 오페라 최고의 디바, 프리마돈나를 논할때 항상 대두되는 인물이다. 빼어난 미모와 더불어 무대에서의 카리스마, 예술적 성취 및 화려함과 비극이 섞여 오랜기간 회자된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녀의 라이벌로는 ‘레나티 테발디’가 있다. 그리스계 미국인으로서 본명은 ‘마리아 안나 소피아 케킬리아 칼로예로플루’이지만 대중들에게는 ‘마리아 칼라스’라는 예명으로 더욱 유명하다.

1.마리아 칼라스의 성장과정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는 1923년 그리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녀는 가족의 경제적인 어려움과 부모의 이혼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음악적 재능을 빠르게 발휘하며,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예술의 세계로 향하게 되었다.

그녀의 부친은 그리스에서 약학을 공부했으나 미국으로 건너와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도 틈틈히 공부를 해 약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중간에 투자에 실패해 손실을 봤지만 상당히 성실한 삶을 살았던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리아의 모친은 자신의 못다이룬 꿈을 마리아를 통해 이루고자하는 면이 강했다. 마리아 역시 그녀의 유년시절을 썩 좋지않은 기억으로 회상하고 있다. 그러한 부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부친은 부부간에 잦은 싸움을 하곤했다. 그녀의 모친은 나중에 남편을 버리고 두 딸을 데리고 그리스로 돌아갔다고 한다.

2.마리아 칼라스, 소프라노 가수활동의 발전과정

1940년대 후반, 마리아 칼라스는 국제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녀의 탁월한 보컬 기술과 강렬한 무대 퍼포먼스는 전 세계적으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특히 베를리온과 푸치니의 오페라에서 그녀의 역할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높은 가격을 지불하며 왔다. 그녀는 완벽주의적인 성격으로 유명하였고, 가끔은 협력자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초기에 그녀는 그리스 음악원에 지원하였으나 기초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는 이유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적 음역대가 메조에서 소프라노의 영역으로 넘나들면서 최종적으로 소프라노로서 훌련을 받았다. 그때 ‘히달고’로 부터 벨칸토 창법에 관해 전수받았다.

그녀는 모친과 지속적인 불화로 여려운 시절을 보냈으며 이로인해 미국으로 다시 넘어가 활동하였다.

미국으로 넘어간 이후의 활동은 그리스 시절에 비해서 순탄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그녀의 90kg에 육박하던 몸무게 때문에 지적을 받아 다이어트를 시행한 적도 있었다. 칼라스는 천신만고 끝에 시카고에서 진행된 ‘투란도트’의 주연으로 캐스팅 되었으나 진행사측이 도산을 하는 바람에 이태리로 옮겨 ‘라조콘다’의 주연을 하였다.

이태리에서 명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을 만나게 된다. 세라핀은 바그너 오페라의 소프라노 파트를 소화할 성악가가 없어서 전전긍긍 하다가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를 듣고 만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라핀이 마리아를 늘 중용한것은 아니었다. 마리아는 자신보다 28세 연상인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를 만나면서 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메네기니는 지속적인 연주기회를 제공하려고 노력했고 숙식을 제공하면서 마리아는 메네기니에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그녀는 1950년 유명한 베르디 오페라의 아이다의 주인공을 맏으면서 유명해졌다. 이때 기존의 주연이었던 ‘레나타 테발디’의 대타로서 무대에 섰는데 이후 레나타는 마리아에게 밀려나게 된다. 마리아는 지속적인 호평에도 90kg에 육박하는 체중에 고심하고 있었고 이후 80kg대로 체중감량을 하면서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에 큰 감명을 받아 더욱 감량을 하고 관객들 앞에 나타났다. 마리아는 완벽주의자의 면모를 보이면서 메네기니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많은 무대에 서게된다.

그녀의 이러한 완벽주의 성향은 많은 관계자들과 불화를 격게되는 요인이 되었다. 이태리에서 음악인들 사이에서 그녀는 호랑이라고 불리워졌다.

1958년 1월에 로마 오페라극장에서의 노르마 공연은 그녀의 몰락을 암시하는 공연이었다. 그녀의 목 상태가 너무 안좋았는데 감독이 그녀의 무대를 고집하여 무대에 섰으나 중간에 공연 중단을 선언하는 해프닝을 만들고 만다. 이는 여러 언론으로 부터 비난의 화살을 맞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3.마리아 칼라스 그 유명인으로서의 사랑과 삶

마리아 칼라스는 선박왕으로 유명한 오나시스와 동거생활을 하면서 여러 우여곡적을 겪었는데 오나시스의 사망이후에 정작 그녀는 그로부터 아무런 재산을 상속받지 못했다.

마리아 칼라스는 말년에 쓸쓸하고 외로운 생활을 하였는데 오로지 낙이라곤 지난날의 앨범을 들어면서 위안하는 것이라고 알려진다.

4.마리아 칼라스의 재미있는 에피소드

한 에피소드에서, 칼라스는 공연 중 자신의 드레스에 찢어진 구멍을 발견했지만, 전투적인 자세로 그대로 공연을 이어갔다. 이는 그의 전문가 정신과 예술적 결단력을 대표하는 사례로 기억된다.

또한 어떤 공연에서는 관객들이 꽃다발 대신 채소를 던지면서 조롱하자 그 채소를 당당히 들며 관객들에게 화답하는 카리스마를 보였다고 한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녀가 한복을 소장하였다는 것이 알려진 것이다. 처음에는 이옷이 기모노를 알려졌으나 SBS정우영 아나운서가 한복인것을 발견하곤 정정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 지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이후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결국 정정되었다고 한다.

마리아 칼라스는 그의 독특하고 복잡한 삶과 놀라운 예술적 기여로 인해 오페라계의 여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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