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로포비치: 첼로의 마법사


1로스트로포비치의 생애와 음악적 여정

로스트로포비치(Rostropovich)는 1927년 소련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었으며, 첼로 연주자로서의 기량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첼로를 연주하는 동안 그의 열정과 탁월한 기술은 청중들을 매료시키며, 그의 음악적 여정은 길고 아름다웠다. 그는 첼로연주의 뛰어난 기술과 해석을 선보이며 첼로의 위상을 전에 없이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벤저민 브리튼등 동시대의 유명 작곡가들과 연향을 주고받았다. 그는 이들 유명작곡가들에게 헌정작품을 받아 레퍼토리를 크게 확장해 나갔다.

로스트로 포비치는 슬라바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첼로의 천재’등의 수식어또한 가지고 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유년시절을 살펴보면 그는 1927년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태어났다. 여기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이어서 발발된 제2차 세계대전중에 그의 가족은 오렌부르크로 이주했고 이후에는 모스코바에 정착했다.

그는 음악적인 분위기의 부모및에서 자라났다. 피아노 연주자였던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첼로는 아버지에게 10살이 되면서 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16세에 모스코바 음악원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로 부터 배우기도 했다.

1945년에 소년연주대회를 비롯한 다양한 경연에서 우승하면서 첼리스크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50년에는 당시로서 가장 권위있었던 스탈린상을 받기도 했다.

결혼은 인기 소프라노앴던 갈리나 비시넵스카야와 결혼했다. 1956년 모스코바 음악원 첼로교수가 되었다.

로스트로포비치

2로스트로포비치의 음악적 새로움과 혁신

로스트로포비치는 음악계에 혁신을 가져온 첼로 연주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연주는 전통적인 음악 경계를 넘어서며, 다양한 음악 장르와 작곡가들과 협업하여 새로운 음악적 언어를 창조했다. 그의 뛰어난 테크닉과 예술적 표현은 첼로 음악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했고, 그의 연주 스타일은 많은 후배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소련 음악가들과 계속해서 음악적 교류와 친문을 이어 나갔다. 1949년 프로코피예프는 그를위해 첼로 소나타를 작곡했고 쇼스타코비치의 첼로협주곡도 로스트로 포비치를 위해 만든것이였다.

그는 유럽지역에서 지속적인 콘서트 투어를 진했했도 서방에서 많은 녹음활동을 이어나갔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협연하여 오이스트라흐, 리흐테르와 녹음한 베토벤 3중 협주곡은 불멸의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서방작곡가와도 교류를 넓혀갔는데 벤저민브리튼이 그중 한명이며 로스트로 포비치에 많은 첼로곡을 헌정했다. 유명 피아니스트였던 브리튼은 로스트로포비치가 ” 브리튼과 연주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라고 이야기 했을만큼 깊은 우정을 나타내고 있다.

1968년 그는 영국의 음악축제에서 소련 국립 교향악단과 안토닌 드로르작의 첼로 협주곡 B단조를 연주했는데 이 전날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군이 프라하의 봄을 저지하기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다. 공교롭게 드보르작은 체고 작곡가였다. 그는 많은 야유와 시위중에 진행되었지만 공연이 끝난후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벤저민 브리튼과 함께

3로스트로포비치의 인간성과 정치적 행동

로스트로포비치는 음악적 업적뿐만 아니라, 인간성과 정치적 행동으로도 기억되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소련의 인권 문제와 자유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예술가의 역할을 넘어 인류의 문제에 대한 행동가로서도 주목받았다. 특히, 그의 친구이자 작곡가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의 긴밀한 관계는 음악과 예술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주창했던 연주자였고 자연스럽게 소련으로부터 많은 억압과 탄압을 받게 되었다. 결국 그는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학교에서 쫓겨나게되었다.

1970년에 작가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을 자기 집에 보호해준것이 화근이 되어 큰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후 지속적인 제제와 연주기회를 박탈당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결국 그는 1974년 가족과 함께 소련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그때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하였다가 1990년에 가서야 소련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그는 1977년부터 1994년까지 미국 워싱턴 DC에서 미 국립교향악단의 음악감독겸 지휘를 맡았다. 동시에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마르타 아르헤리치, 스바토슬라프 리흐테르등의 피아니스트들과 계속해서 음악적 교류를 이어나갔다.

베르릴 장벽이 무너지는 동안 그는 그 벽 아래에서 즉흥 연주를 선보이기도 했고 이연주는 세계적으로 매우 크게 유명해졌다. 그때 연주했던 곡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 부레 1번이었다.

4로스트로포비치의 유산과 영향

로스트로포비치는 2007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음악과 정치적 행동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의 뛰어난 예술적 기여와 정의를 위한 싸움은 후세에게 지속적으로 영감을 주고 있다. 그는 첼로 연주자로서만이 아니라, 예술의 힘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예시로 기억되고 있다.

살아생전의 그의 연주는 굉장히 화려하고 거대한 톤으로 팬들에게 기억된다. 그로 인해 많은 첼로기법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가 연주했던 그의 분신인 첼로악기는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의 1711년작 듀포르이다. 이 첼로는 나폴레옹 치하에서 나폴레옹으로인한 상처가 남아있다고 한다.

그는 1980년에 국립교향악단과 함께 내한해서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하였고 이후 다시한번 연주기회가 있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취소된바 있다.

불세출의 명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파블로 카잘스”와 함께 20세기 명 첼리스트로 불리워지면 아직까지도 많은 음악애호가들에게 사랑받는 연주자로 남아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로 그린 음악적 풍경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새롭고 강렬한 영감의 원천이다. 그의 뛰어난 연주 기술과 예술적 표현은 전 세계의 음악애호가들에게 끊임없는 감동을 선사하며, 그가 남긴 유산은 끊임없이 이어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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